H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던 시절이다. 내 게으름 탓에 마감일을 넘길 위기에 놓였다. 마감 당일 오후에 다른 회의 일정까지 잡혔다. 신문사에서 기사를 펑크 낼 상황이 되면 '담당 기자 얼굴이라도 넣어야 한다'는 웃지 못할 우스개가 있다. 기사는 아니고 칼럼이니 칼럼 필자인 내 얼굴이라도 넣어야 하는 상황이다. 급히 담당 기자와 통화했다. 묘수 아닌 묘수를 냈다.

마침 오후 회의 장소가 H일보사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즉시 H일보사로 향했다. 그리고 담당 기자 자리에 앉아 그분의 노트북으로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담당 기자는 커피를 가져다주며 나를 응원했다. 약 40분 만에 원고지 10매 칼럼을 완성했다. 개인적으로 글 쓰는 속도 신기록이다. 지금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기록을 깨야 할 일이 생기면 결코 안 된다.

그런데 이 일이 신문기자들 사이에 소문이라도 난 걸까? 이후 다른 필자가 마감을 어긴 칼럼 원고를 두 번 써봤다. 다른 필자가 마감 어길 때 긴급 투입되는 '대타 칼럼니스트'라고나 할까. 그 두 경우 모두 담당 기자와 통화한 뒤 약 1시간 30분 안에 글을 써서 보냈다. 위기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와 상황을 정리하는 특급 소방수, 오승환 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작가라면 마감에 얽힌 특별한 사연 한두 개쯤은 갖고 있다. 대부분은 저런 부끄러운 무용담이다. 미리미리 쓰지 않고 미루다가 초읽기 마감에 쫓기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원고를 써 보냈으니 나름 무용담이다. 마치 마감이란 지키기보다는 어기기 위해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러면 안 되는 데 말이다.

마감일은 '그날을 넘기지 않겠다는'는 약속이다. 마감일에 원고를 보내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늦어도 그때까지는 보내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적지 않은 작가들은 마감일 당일에 보내겠다는 약속으로 여긴다. 마감이 임박하도록까지 미루고 또 미룬다. 그러다가 마감일 하루 이틀 전에나 쓰기 시작하거나 당일에 벼락치기로 쓴다.

물론 늘 그렇게 벼락을 치는 건 아니다. 마감 2~3일 전에 원고를 다 써놓고도 보내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 왠지 이대로 보내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다. 글의 품질이 내 성에 차지 않아서 납품을 꺼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고를 다시 들여다봐도 딱히 고칠 곳이 떠오르진 않는다. 결국 마감일에 그대로 보내고는 한다.

마감일보다 한참 일찍, 예컨대 한 주나 앞서 원고를 완성할 때도 아주 가끔 있기는 있다. 비록 1년에 한두 번이긴 하지만. 그럴 땐 완성했다고 원고를 즉시 보내지 않는다. 일부러 마감일 이틀 전에 보낸다. 너무 일찍 보내면 무성의하게 썼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감 하루 전보다 이틀 전에 보내면 편집자가 한층 더 고마워하기 때문이다.

'마감일을 넘기면 청탁 무효'라는 조건이 붙은 원고 청탁도 받아봤다. 내가 받아본 가장 이상한, 그러나 스릴 넘치는 청탁이었다. 처음 원고청탁서를 봤을 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고료 벌고 싶으면 이때까지 원고 보내라!', 뭐 이런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나름 열심히 썼다. 원고 마감일을 넘기기 직전, 밤 11시 50분쯤 원고를 보냈다.

원고 마감에 관해 빼놓을 수 없는 게 원고 독촉이다. 담당 편집자가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마감일이 가까워졌다는 것, 마감일이 지났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방식이 많다. 내가 마감일을 잊고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저런 이메일이나 메시지는 사실상 이런 뜻이다.

"제발 서둘러주십시오. 저희와 약속하셨잖아요!"

나도 어지간히 마감 어기는 축에 들지만 열심히 쓰는데 원고 독촉 메시지 받으면 갑자기 화가 날 때도 있다. 공부하려고 마음잡고 책상에 앉았더니, 엄마가 "너 제발 공부 좀 해라!" 말씀하시면? 하지만 화낼 일이 아니다. 자기가 게을러서 미루고 미루다가 마감에 쫓기는 주제에, 무슨 화를 낸단 말인가. 인간적 수양이 덜 된 탓이다.

드물지만 필자가 아니라 출판사가 마감을 어기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나에게는 초고를 넘긴 지 5년이 넘었지만 책으로 나오지 않은, '비운의 원고'가 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작용하면서 출판사가 책을 내지 않고 5년이 지난 것이다. 출판사가 '출간 마감'을 어긴 것이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뭐 언젠간 나오겠지'라고 생각한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글 쓰지 않는 시간에도 사실은 글을 쓰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자료를 찾고 글을 풀어나가기 위한 실마리를 궁리하며 글의 구성을 고민한다.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등판하기 전에 불펜에서 연습 투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 경기에 등판하여 던지는 시간보다 불펜에서 연습 투구하는 시간이 더 길 때도 많다.

하지만 결국 쓰기 시작해야 한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다. 손가락으로 쓰는 것이다. 글은 생각하는 대로 쓰는 게 아니다. 쓰기 시작해야 비로소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글쓰기의 가장 큰 동기는 원고료다. 가장 큰 동력은 마감이다. 가장 중요한 힘은 글 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다. 마감이 아무리 코앞이어도, 써야 할 원고 매수가 아무리 많아도, 마침내 나는 쓸 수 있다는 자기 신뢰다.

하늘은 자기 자신을 믿는 자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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